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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라는 말의 이상과 현실

워라밸이 중요하다고 다들 말하는데,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면접에서 들은 말

면접에서 "저희 회사는 워라밸을 중요시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복지 소개 슬라이드에 "유연 근무제, 자율 출퇴근, 원격 근무 가능"이 적혀 있었다. 이직의 큰 이유 중 하나가 워라밸이었으니까, 좋다고 생각했다.

입사 3개월 후의 현실: 유연 근무제는 있지만 9시 전에 오는 사람이 없으면 눈치가 보인다. 자율 출퇴근은 있지만 6시에 퇴근하면 "벌써 가?" 하는 분위기. 원격 근무는 가능하지만 주 2회까지만.

제도와 문화는 다른 거라는 걸 배웠다.

워라밸의 이상

워라밸의 이상적인 모습은 이런 거겠지.

6시에 칼퇴. 저녁에 운동이나 취미 활동. 주말에는 일 생각 안 하기. 연차 자유롭게 사용. 업무 연락은 근무 시간 내에만.

이런 삶을 사는 개발자가 주변에 있는지 생각해봤다. 한 명 있다. 외국계 회사 다니는 친구. 그 친구는 진짜 6시에 퇴근하고, 주말에 등산 다니고, 업무 카톡 같은 건 존재 자체가 없다.

나머지는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하다. 야근이 잦거나, 주말에 온콜이 있거나, 퇴근 후에도 슬랙을 보거나.

워라밸의 현실

솔직한 나의 워라밸:

  • 평균 퇴근 시간: 7시 14분 (작년 기록 기반)
  • 주말 업무: 월 2~3회 (간단한 핫픽스나 모니터링)
  • 퇴근 후 슬랙 확인: 매일 (안 보려고 하는데 습관적으로 열게 된다)
  • 연차 사용: 작년 15일 중 11일 사용

나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근데 "좋다"고는 못 하겠다. 이게 밸런스인가? work 쪽으로 좀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근데 이것도 다른 회사 다니는 친구한테 말하면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한다. 기준이 어디 있는 건지.)

밸런스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

"밸런스"는 50:50을 연상시킨다. 근데 깨어 있는 시간이 16시간이라면, 일에 8시간, 삶에 8시간? 출퇴근 시간, 식사 시간, 집안일 빼면 순수 "나의 시간"은 3~4시간이다. 8시간 일하고 4시간 사는 게 밸런스인가.

어떤 사람은 "워라밸이 아니라 워라블(work-life blend)"이 맞다고 한다. 일과 삶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섞이는 거라고. 근데 섞이면 보통 일이 삶을 침식하지, 삶이 일을 침식하진 않는다.

재택근무가 그 예다. 재택하면 출퇴근 시간이 절약되니까 워라밸이 좋아질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집에 있으니까 좀 더 할 수 있지"가 된다. 노트북을 닫는 시점이 모호해진다.

워라밸은 특권인가

불편한 말이지만, 워라밸을 따질 수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직할 여력이 있는 사람, 스킬셋이 시장에서 가치 있는 사람, 가족 부양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 이런 조건이 갖춰져야 "워라밸이 안 좋으니 옮기겠다"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워라밸이 중요하다"는 말은 공허하다. 알아. 중요한 거. 근데 선택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하니까

완벽한 워라밸은 없다. 근데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건 필요한 것 같다.

나의 최소한의 선:

  1. 주말 중 하루는 절대 일 안 하기
  2. 평일 밤 10시 이후 슬랙 안 보기
  3. 연차는 최소 12일 이상 사용하기

이것도 완벽히 지키진 못한다. 근데 규칙이 있으면 어길 때 인식은 한다. "아 지금 선을 넘고 있구나" 하는 자각. 규칙이 없으면 무한정 일하게 되니까.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지 꽤 됐는데, 주변을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말은 많아졌는데 현실은 그대로인 것.

언젠가 진짜 바뀔까. 아니면 이대로인 걸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안고 내일도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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