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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퇴직, 한국 개발자 버전

Quiet Quitting이 한국 개발 현장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열정의 소진과 적당함 사이.

팀에 한 명이 있다

아침에 출근하고, 할당된 일을 하고, 정시에 퇴근한다.

슬랙 반응은 이모지 하나. 코드 리뷰는 "LGTM" 한 줄. 회의에서 발언은 최소한. 기술 세미나에 이름이 없다. 사이드 프로젝트도 안 한다. 일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맡은 건 해낸다. 다만 맡은 것 이상을 하지 않는다.

조용한 퇴직. 실제로 퇴직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만 수행하는 거다.

미국 거랑은 좀 다르다

미국에서의 Quiet Quitting은 "내 직무 기술서에 없는 일은 안 한다"라는 합리적 경계 설정에 가깝다. 워라밸의 적극적 실천.

한국에서는 결이 다르다. 조용한 퇴직이 선택이 아니라 소진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주니어 때 밤새 코딩하고, 사이드 프로젝트 하고, 블로그 쓰고, 컨퍼런스 발표하던 사람이 3~4년 차쯤 되면 조용해진다. 열정이 식은 게 아니라 태운 거다. 연료가 바닥난 거다.

보이지 않는 기대치

한국 IT 업계에는 보이지 않는 기대치가 있다.

퇴근 후에도 공부할 것.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따라갈 것.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것. 깃허브 잔디를 채울 것. 기술 블로그를 운영할 것. 이 중 어느 것도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다. 근데 안 하면 "성장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8시간 동안 코드를 쓰고 퇴근한 뒤에도 코드를 써야 성장하는 사람인 건가. 요리사한테 퇴근 후에도 요리하라고 하면 이상하다고 느낀다. 건축가한테 주말에도 건물 설계하라고 하면 부당하다고 느낀다. 개발자한테만 유독 관대한 이 기대치는 어디서 오는 걸까. (이건 좀 생각할수록 이상한 것 같다.)

그 동료를 보면서

조용한 퇴직을 하는 동료를 보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한편으로는 "저러면 성장이 멈추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게 건강한 거 아닌가" 싶다. 매일 120%를 쏟으면 언젠가 마이너스가 된다. 꾸준히 80%를 유지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멀리 갈 수도 있다.

마라톤 선수가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지 않는 것처럼. 개발자 커리어는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이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천하기가 어렵다. 남들이 달릴 때 걷기가 불안하니까.

시스템의 문제

개인의 열정에 기대는 조직은 오래 못 간다.

조용한 퇴직이 늘어난다면, 그건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시스템 문제다. 성장을 개인의 시간과 비용으로 떠넘기고 있진 않은지. 동기부여를 "열정" 하나로 해결하려 하고 있진 않은지.

좋은 조직은 업무 시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학습 시간을 보장하고, 기술 부채를 줄일 여유를 주고, 새로운 시도를 허용한다. 직원이 조용해졌다면, 직원을 탓하기 전에 환경을 돌아봐야 한다.

조용해지는 것도 방법이다

그 동료한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괜찮으냐고.

근데 묻지 않는다. 그게 그 사람의 방식이니까. 선택이든 소진이든, 지금 그 사람한테 필요한 페이스가 있을 거다.

가끔은 조용해지는 것도 살아남는 방법이다. 모든 시즌에 MVP가 될 필요는 없다. 경기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시즌도 있다.

다만 조용함이 체념이 되지 않기를.

쉬는 것과 포기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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