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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충동이 드는 순간들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진짜 그만두고 싶어서가 아닐 수도 있다.

회의실에서 나왔다

한 시간 동안 요구사항이 세 번 바뀌었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본다. 슬랙에 새 메시지. "아까 회의 내용 정리해서 공유해주세요." 정리할 게 있어야 정리를 하지. 그 순간 머릿속에 선명한 문장이 떠오른다.

아, 때려치고 싶다.

만든 게 사라질 때

일의 의미가 사라질 때 퇴사 충동이 온다.

2주 동안 공들인 기능이 기획 변경으로 폐기된다. "방향이 바뀌었어요." 한 문장으로 2주가 증발한다. 코드는 브랜치 채로 삭제된다. 커밋 로그만 남는다. 아무도 안 읽을 커밋 로그.

개발자는 만드는 사람이다. 만든 게 사라지면 존재 이유가 흔들린다. (이건 좀 과장일 수도 있는데, 그 순간에는 진짜 그런 기분이다.)

전 직장 동료의 인스타

전 직장 동료가 인스타에 올린다. "이직했습니다."

연봉이 올랐을 거다. 복지가 좋아졌을 거다. 사무실이 넓어졌을 거다. 근거 없는 확신으로 남의 잔디가 푸르러 보인다. 링크드인은 더 잔인하다. 다들 승진하고, 이직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 나만 제자리인 것 같다.

SNS는 하이라이트 릴이라는 걸 안다. 알면서도 비교한다. 인간이라 그렇다.

금요일 저녁의 피로

금요일 저녁, 일주일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이 피로가 주말에 풀리면 괜찮다. 문제는 월요일 아침에도 피로가 남아 있을 때.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회복되지 않는 피로가 쌓이면, 퇴사 충동은 감정이 아니라 신체 신호가 된다.

번아웃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들키지 않게 스며든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 이미 시작이었다는 걸 안다.

72시간 규칙

퇴사 충동은 자주 온다. 퇴사 결심은 드물다.

충동은 감정이고 결심은 판단이다. 충동은 회의실에서 나올 때 오고, 퇴근길에 사라진다. 결심은 조용한 밤에 오고, 다음 날 아침에도 남아 있다.

나는 72시간 규칙을 쓴다. 3일 뒤에도 같은 생각이면 진지하게 고민한다. 대부분은 3일 안에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만 진짜 문제다.

충동의 쓸모

충동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퇴사를 상상하는 순간,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진다. 내가 진짜 싫은 게 뭔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선명해진다. 평소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던 것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퇴사 충동은 일종의 자기 진단서다. 매번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그 순간 떠오른 감정들은 기억해둘 가치가 있다.

어쨌든 내일도 출근한다

퇴사 충동은 어제도 왔고 오늘도 올 거다. 그리고 나는 아마 내일도 출근할 거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계속하는 마음 사이에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후자를 선택한다. 의지가 아니라 관성일 수도 있고, 현실 때문일 수도 있다. (솔직히 월세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의 퇴사 충동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라질 거다. 내일 아침 다시 알람이 울릴 거다. 그리고 나는 또 출근할 거다.

적어도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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