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일할 때의 매너에 대하여
재택 개발자가 카페에서 일하며 느낀 암묵적 규칙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6시간
솔직하게 고백한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놓고 6시간 동안 앉아있었던 적이 있다. 4,500원짜리. 시간당 750원. 코워킹 스페이스보다 싸다. 그날 매장에 빈자리가 있었고, 와이파이가 빨랐고, 에어컨도 잘 나왔다. 근데 퇴근하고 나오면서 문득 생각했다. "내가 진상이었나?"
이 생각이 든 이후로 카페에서 일할 때의 매너를 나름대로 정리하게 됐다.
최소 주문 기준을 정하자
내 기준은 2시간에 음료 1잔이다. 6시간 있으면 3잔. 이게 비싸다고 느껴지면 그냥 집에서 일하는 게 맞다. 카페는 사무실이 아니다. 음료를 파는 사업장이고,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큼의 매출이 발생해야 사장님이 월세를 낸다.
근데 현실은 잘 안 된다. 코딩에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 차리면 3시간이 지나있다. 그래서 폰 타이머를 2시간으로 맞춰놓는다. 울리면 주문하러 간다. 디카페인이라도.
콘센트 독점하지 말기
맥북 충전기가 콘센트 하나를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못 쓴다. 근데 솔직히 맥북 충전은 필수다. 배터리가 50% 이하면 불안하다. (개발자 특유의 불안감인지, 기기 의존증인지 모르겠다.)
타협안으로 멀티탭을 가지고 다닌다. 카페 콘센트에 내 멀티탭을 꽂고, 거기에 내 충전기를 꽂으면 나머지 구멍은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다. 이거 실천하는 사람을 아직 나 빼고 못 봤다. 근데 옆에 앉은 사람이 "혹시 콘센트 좀 쓸 수 있을까요?" 할 때 "여기요"라고 멀티탭을 가리키면 반응이 꽤 좋다.
화상 회의는 진짜 하지 말자
이건 매너가 아니라 상식이다. 근데 놀랍게도 카페에서 노트북 스피커로 줌 미팅을 하는 사람이 있다. 주변 소음이 상대방한테 가는 건 물론이고,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이 회의 내용을 듣게 된다. 한번은 옆 테이블에서 기밀 같은 프로젝트 얘기를 스피커로 하길래 민망했다.
급한 전화는 어쩔 수 없지만, 예정된 회의가 있는 날은 카페에 가지 않는 게 맞다. 나도 이걸 한 번 어겼다가, 스탠드업 미팅 중에 카페 BGM이 들어가서 "거기 카페예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뒤로 카페 가는 날에는 미팅을 안 잡는다.)
자리 선택의 기술
2인석에 혼자 앉으면 빈 의자 하나가 낭비된다. 가능하면 1인석이나 바 좌석에 앉는다. 점심시간 전후(12시~1시 반)에는 식사하러 오는 손님이 많으니까, 이 시간에는 자리를 비워주는 게 좋다. 나도 점심시간에 잠깐 산책하고 돌아오는 패턴을 만들었다.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데, 이유가 있다. 화면 반사가 적어서 모니터가 잘 보인다. (사실 분위기 때문이다.)
단골이 되면 달라지는 것
같은 카페에 주 2~3회 가니까 직원이 얼굴을 알아본다. "아메리카노요?" 하면서 묻기도 전에 주문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좀 편하다. 오래 앉아있어도 눈치가 덜 보인다. 단골에 대한 관용이라고 할까.
근데 이건 양방향이다. 단골이면 더 많이 소비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다. "매번 아메리카노만 시키면 좀 그런가?" 해서 가끔 디저트도 시킨다. 크루아상 4,800원. (카페 사장님의 심리 전략에 당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카페 코딩이 왜 좋은지
집에서 일하면 소파가 유혹한다. 침대가 유혹한다. 냉장고가 유혹한다. 카페에는 그런 게 없다. 적당한 소음(카페 백색소음이 집중에 도움된다는 연구가 실제로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주는 적당한 긴장감, 커피 향.
근데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출근하는 느낌"이다. 재택근무하면서 잃어버린, 장소의 전환이 주는 심리적 스위치. 집은 쉬는 곳, 카페는 일하는 곳. 이 구분이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도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메리카노 두 번째 잔. 3시간째. 양심의 기준은 지키고 있다.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