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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업무 카톡, 어디까지 참아야 하나

저녁 9시 23분, 매니저한테 카톡이 왔다. '이거 내일까지 가능할까요?' 폰을 내려놓을 수 없다.

밤 9시 23분의 카톡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밤 9시 23분.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매니저: "혹시 내일 오전 회의 전까지 API 스펙 정리 가능할까요?"

읽었다. 읽씹하기엔 이미 1이 사라졌다. 답을 해야 한다.

"네 가능합니다" 라고 치다가 지웠다. 솔직히 오늘 퇴근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근데 "안 됩니다"라고 하기엔... 뭔가 그렇다. 결국 "네 내일 아침에 일찍 와서 하겠습니다"라고 보냈다.

보내고 나서 유튜브가 재미없어졌다. 머릿속으로 API 스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10시에 노트북을 켰다.

한국에서 업무 카톡은 문화다

외국 회사 다니는 친구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냥 내일 출근해서 보면 안 돼?"라고 했다. 이론적으로는 맞다. 근로시간 외의 업무 연락은 개인의 자유 시간 침해다.

근데 한국 IT 회사에서 그렇게 하면 "응답이 느린 사람"이 된다. 아무도 대놓고 뭐라 하진 않는다. 근데 은근히 평판에 영향을 준다. "저 사람은 퇴근하면 연락이 안 돼" 같은.

슬랙은 그나마 낫다. 상태를 "자리 비움"으로 바꿔놓으면 양해가 되니까. 근데 카카오톡은 다르다. 카톡은 개인 메신저인데 업무 도구로 쓰이고 있어서, 경계가 없다.

단톡방의 지옥

개인 카톡도 문제지만, 업무 단톡방이 진짜 문제다.

우리 팀 단톡방에서는 밤 11시에도 메시지가 올라온다. "이거 확인 부탁드려요" "내일 회의 안건 공유합니다" "서버 로그 좀 봐주세요". 읽지 않으면 빨간 숫자가 쌓이고, 다음 날 아침에 스크롤을 올리면서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한번은 주말에 단톡방에서 64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전부 읽는 데 23분 걸렸다. 그중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은 2건이었다.

(근데 2건을 걸러내려면 64개를 다 읽어야 하니까 결국 같은 거다.)

연락 거부는 가능한가

법적으로는 가능하다. 퇴근 후 업무 연락에 대한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논의되고 있고,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근데 현실에서 실천하기가 어렵다. 특히 스타트업이나 작은 팀에서는. 내가 안 보면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하고, 그러면 미안하고, 미안하면 결국 보게 되고.

한번 시도해봤다. 퇴근 후 슬랙과 업무 카톡 알림을 끄는 거. 2주간 실행했다.

결과: 업무에는 문제가 없었다. 진짜로 급한 건 전화가 왔고, 나머지는 다음 날 처리해도 됐다. 근데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혹시 긴급한 게 있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계속 있었다. 알림을 꺼도 앱을 열어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누구의 잘못인가

매니저 탓만 할 수는 없다. 매니저도 밤 9시에 카톡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매니저 위의 누군가가 급하게 요청했거나, 내일 아침 회의에서 필요한 자료가 빠진 걸 뒤늦게 발견했거나.

구조의 문제다. 일정이 항상 빡빡하고, 여유가 없으니까 퇴근 후에도 일이 흘러넘치는 거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오늘 밤에 카톡을 봤고, 결국 노트북을 켰다. 내일 아침에 일찍 오면 될 것을 밤에 한 이유는, 내일 아침에 여유 있게 출근하고 싶어서다.

이 선택이 내 것인지, 환경이 만든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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