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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하는 개발자의 점심시간

점심마다 같이 먹자는 말에 지쳐서, 어느 순간부터 혼밥이 편해졌다.

"점심 뭐 먹어요?"

12시가 되면 슬랙에 올라오는 이 문장이 부담스러워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같이 먹었다. 당연히. 팀원들이랑 뭘 먹을지 고민하고, 줄 서고,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점심시간의 정석이다.

근데 점심시간이 1시간인데, 뭘 먹을지 고민하는 데 12분, 이동하는 데 7분, 줄 서는 데 15분, 먹는 데 20분, 돌아오는 데 7분. 나한테 남는 시간이 없다. 점심 먹고 와서 바로 키보드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어느 날 혼자 나갔다. 아무 말 없이.

혼밥의 기술

혼밥의 핵심은 주문과 식사를 최적화하는 거다.

나의 루틴: 회사에서 도보 3분 거리 국밥집. 메뉴는 돼지국밥 8,500원. 앉으면 30초 안에 나온다. 먹는 데 7분 40초. (이건 진짜 재본 적이 있다.) 도보 왕복 포함 총 18분.

남는 42분 동안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거나, 근처를 산책하거나, 핸드폰으로 글을 읽거나 한다. 이 42분이 소중하다.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는 42분.

(이렇게 쓰면 좀 사회성 없는 사람 같은데, 회의를 하루에 3~4개 하면 이해가 될 거다.)

같이 먹자는 말을 거절하는 게 어렵다

문제는 거절이다. "점심 같이 먹어요" 하는데 "아 저 혼자 먹을래요"라고 말하기가 미묘하다.

처음에는 "오늘 좀 빨리 먹고 와야 해서"라고 둘러댔다. 근데 이게 매일이면 눈치가 보인다. 나중에는 그냥 솔직하게 "저 점심은 보통 혼자 먹어요"라고 했다.

반응은 의외로 괜찮았다. "아 그래요?" 하고 끝. 근데 속으로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저 사람 좀 이상하네" 할 수도 있다. 뭐 어쩔 수 없다.

한번은 신입이 "선배님이랑 같이 먹고 싶어요" 해서 같이 갔다. 그날은 뭘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17분이었다. 선택 장애가 2명이면 제곱이 되는 것 같다.

점심 혼밥을 안 좋게 보는 시선

한국 회사 문화에서 점심을 혼자 먹는 건 좀 특이한 행동으로 분류된다. "왕따 아니야?" "팀 분위기가 안 좋은 거 아니야?" 이런 시선.

실제로 매니저 면담에서 "팀원들이랑 점심 같이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팀 빌딩 차원에서. 이해는 하는데, 내 유일한 리프레시 타임을 사회성 포인트에 쓰라는 건 좀 가혹하다고 느꼈다.

근데 그 말을 듣고 나서 일주일에 2번은 같이 먹는다. 완전 거부는 안 하되, 매일은 안 한다는 타협점.

혼밥이 주는 것

밥을 혼자 먹으면 생각이 정리된다. 오전에 짠 코드를 머릿속으로 되짚어보거나, 오후에 할 작업을 계획하거나. 뭔가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멍하니 있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12시부터 1시까지가 하루 중 유일하게 내 것인 시간이니까.

오늘도 국밥집에 갔다. 사장님이 "오늘도 같은 거?" 하셨다. 네. 8,500원 찍고 앉으면 30초 안에 나온다.

안정적이다. 코드에서도 일관성이 중요하듯이, 점심에서도 일관성이 중요하다.

이건 좀 억지 비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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