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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aS 가격 책정의 심리학

왜 모든 SaaS가 3단계 가격표를 쓰는지, 그 뒤에 숨은 심리 전략

사이드 프로젝트에 가격을 매기려다 멘붕이 왔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든 도구에 유료 플랜을 달려고 했다. "얼마를 받지?" 이 질문에서 3일을 멈췄다. 무료로 풀기엔 서버비가 월 23,000원 나가고, 너무 비싸게 받으면 아무도 안 쓸 거고. 그래서 다른 SaaS들 가격표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끼굴에 빠졌다.)

왜 전부 3단계인가

Notion, Slack, Vercel, Linear. 가격표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3단계다. Free, Pro, Enterprise. 또는 Basic, Plus, Business.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이게 "앵커링 효과" 때문이다. 가장 비싼 플랜이 기준점이 된다. Enterprise가 월 45달러인 걸 보면, Pro 15달러가 저렴하게 느껴진다. 실제로는 15달러가 비싼 건데, 45달러 옆에 놓으니까 합리적으로 보이는 거다.

가운데 플랜에 "Most Popular" 배지를 다는 것도 다 계산이다. 사람들은 극단을 피하려는 심리가 있어서, 3개 중에 가운데를 고르는 경향이 강하다. 이걸 "타협 효과"라고 한다.

무료 플랜의 진짜 목적

무료 플랜이 자선사업인 줄 알았다. 아니다. 무료 사용자는 광고판이다. Notion 페이지 하단에 "Made with Notion" 들어가고, Slack 무료는 메시지 히스토리 제한으로 "유료 전환 안 하면 불편해" 느낌을 계속 준다.

더 교활한 건 "사용 습관 형성"이다. 무료로 쓰다가 기능에 익숙해지면, 다른 도구로 갈아타는 비용(switching cost)이 높아진다. 데이터도 쌓여 있고, 팀원들도 다 쓰고 있고. 그 시점에 "Pro로 업그레이드하세요"가 뜬다.

가격 끝자리의 비밀

SaaS 가격이 $9.99가 아니라 $10인 이유가 있다. 소비재는 $9.99로 1원이라도 싸 보이게 만드는데, SaaS는 반대로 깔끔한 숫자를 쓴다. $10, $25, $49. 이게 "프리미엄 느낌"을 준다. 싸구려가 아니라 프로페셔널 도구라는 인상.

근데 재미있는 건, 이 규칙을 깨는 SaaS도 있다. 월 $7이나 $12 같은 애매한 숫자를 쓰는 곳은 "우리는 비싸지 않아요"를 강조하려는 전략이다.

연간 결제 할인의 함정

"연간 결제 시 20% 할인!" 이거 누가 봐도 좋은 딜 같다. 근데 SaaS 입장에서 이건 12개월 치 매출을 확정하는 것이다. 고객 이탈률(churn rate)이 월 5%인 서비스가 월간 결제만 받으면 12개월 뒤에 고객의 54%가 남는다. 연간 결제를 받으면? 해약하기 귀찮아서 대부분 남는다.

내 사이드 프로젝트에도 연간 결제 옵션을 넣었다. 결과? 연간 결제 전환율이 8%였다. 기대했던 30%와는 한참 차이. 브랜드 신뢰가 없는 무명 서비스에서는 1년치를 선불로 내는 게 리스크로 느껴지나 보다. 이걸 깨닫는 데 2개월이 걸렸다.

내 사이드 프로젝트는 결국

월 4,900원짜리 단일 플랜으로 정했다. 3단계 가격표를 만들 만큼 기능이 많지 않았다. 무료 플랜에 핵심 기능 70%를 넣고, 유료는 "더 편하게 쓸 수 있는" 부가 기능으로 차별화했다.

결과는 솔직히 처참했다. 3개월간 유료 전환 11명. 월 매출 53,900원으로 서버비 23,000원 빼면 순이익 30,900원. (시급으로 치면... 계산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근데 이 과정에서 배운 건 있다. 가격은 숫자가 아니라 심리학이라는 것. 기능 목록보다 "이 가격을 보고 사람들이 뭘 느끼는가"가 전환율을 결정한다는 것.

다음에 가격을 매길 때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솔직히 자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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