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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ASMR인 사람

타건감 때문에 키보드를 4개나 샀다. 생산성은 안 올랐다.

첫 기계식 키보드

멤브레인에서 기계식으로 넘어간 건 3년 전이다. 동료가 쓰는 키보드 소리를 듣고 "저거 뭐야?" 했던 게 시작. 체리 MX 갈축이었다. 사무실에서 들으면 좀 시끄러운데, 뭔가 중독성 있는 소리.

그날 바로 검색했다. "기계식 키보드 입문 추천". 2시간 동안 유튜브 타건 영상만 봤다. 적축, 갈축, 청축, 흑축. 이런 세계가 있었나. 결국 레오폴드 FC750R 적축을 샀다. 139,000원.

택배 오자마자 뜯었다. 첫 타건. 작각작각. 뭐랄까, 손가락이 행복했다. 멤브레인이 수박 두드리는 느낌이면, 기계식은 피아노 건반 누르는 느낌이다. (이건 좀 과장이긴 하다.)

그다음부터 일이 커졌다

적축이 좋았는데, 유튜브에서 "적축은 입문용이고 진짜는 커스텀"이라는 영상을 봐버렸다.

커스텀 키보드라는 게 있다. 하우징, 기판, 스위치, 키캡을 따로 사서 조립하는 거다. 마치 PC 조립처럼. 아니, PC 조립보다 더 깊다. 스위치만 해도 종류가 수백 개다.

두 번째 키보드: 키크론 Q1 Pro + 게이트론 오일킹. 243,000원. 윤활까지 했다. 스위치 67개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크라이톡스 205g0을 바르고 다시 조립했다. 이 작업에 4시간 15분 걸렸다.

결과물의 소리는 달랐다. "톡톡톡"이 아니라 "탁탁탁".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소리. 이걸 듣고 타이핑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진짜로.

생산성은 올랐을까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키보드를 4개 거치면서 타이핑 속도를 재봤다. 첫 번째 키보드: 분당 412타. 네 번째 키보드: 분당 423타. 11타 차이. 이걸 위해 총 847,000원을 쓴 거다.

코드 품질도 키보드랑 상관없다. 좋은 키보드로 쓴 버그 코드는 여전히 버그 코드다. 타건감이 좋으면 버그가 줄어드는 마법 같은 건 없다.

그러면 왜 계속 사는 걸까. 솔직히 그냥 기분이 좋아서다. 타이핑이라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지니까 코딩을 시작하는 허들이 낮아지는 느낌? 근데 이것도 플라시보일 수 있다.

사무실에서의 민폐

세 번째 키보드로 청축을 잠깐 쓴 적이 있다. 이건 실수였다.

청축 소리는 "칙칙칙칙". 타이핑할 때마다 금속성 클릭음이 난다. 나는 ASMR인데 남들한테는 소음이다.

옆자리 동료가 이틀 만에 "그 키보드 소리 좀 줄일 수 없어?"라고 했다. 표정이 진지했다. 바로 다음 날 적축으로 바꿨다.

(근데 집에서는 아직도 청축 쓴다. 혼자니까.)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지금 내 책상 위에 키보드가 3개 있다. 하나는 사무실용, 하나는 집용, 하나는 스위치를 바꿀 예정인 대기 상태. 네 번째는 동료한테 줬다.

커스텀 키보드 커뮤니티에서 "엔드게임"이라는 말을 쓴다. 더 이상 키보드를 안 사도 되는 최종 상태. 근데 엔드게임에 도달했다는 사람이 또 새 키보드를 사는 걸 여러 번 봤다.

이 취미는 끝이 없다. 돈도 없다. 근데 새 스위치 리뷰 영상이 올라오면 또 클릭하게 된다.

오늘도 타건 영상을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볼륨 높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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