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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죽는 구형 노트북에 대하여

7년 된 ThinkPad가 아직도 돌아가는 이유와 그걸 버리지 못하는 이유

2018년에 산 ThinkPad

2018년에 산 ThinkPad X280이 아직도 돌아간다. 7년이다. 배터리는 원래의 43% 정도밖에 안 남아서 충전기 없이는 2시간을 못 버티지만, 전원 꽂으면 멀쩡하다. 키보드 F5 키가 좀 뻑뻑한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다. (새로고침을 자주 하는 직업이라 F5만 먼저 닳았다.)

회사에서는 맥북을 쓰고, 이 ThinkPad는 집에서 개인 작업용으로 쓴다. 주말에 블로그 글 쓰거나, 가벼운 사이드 프로젝트를 돌리거나.

새 노트북을 살 이유가 매번 사라진다

"이번 연말에는 새 거 사야지" 하는 생각을 매년 한다. 근데 매번 "아직 이거 돌아가는데..."로 끝난다.

작년 블프에 맥북 에어 M3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카트에까지 넣었다. 1,390,000원. 결제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ThinkPad를 켜봤다. 잘 돌아간다. 그래서 안 샀다.

이게 합리적인 판단인지 그냥 인색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느린 건 맞다

솔직히 느리다. VS Code를 켜는 데 14초 걸린다. 새 맥북은 3초라고 한다. 크롬 탭 15개 이상 열면 팬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Docker를 돌리면 노트북이 드라이기가 된다.

근데 이상하게 이 느림에 적응이 됐다. VS Code가 켜지는 14초 동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빌드 돌아가는 동안 스트레칭을 한다. 강제 휴식 타임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다.

수리 이력

7년 동안 고친 게 세 번 있다. SSD를 한 번 교체했다. 원래 256GB였는데 512GB로 올렸다. 43,000원. 램을 8GB에서 16GB로 올렸다. 이건 좀 비쌌다. 71,000원. 그리고 충전 단자가 헐거워져서 용산 가서 수리했다. 25,000원.

총 수리비 139,000원. 새 노트북 가격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이 계산을 할 때마다 "아직 괜찮아"라는 결론이 나온다.

근데 이게 생산성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닌가

이건 좀 부정하기 어렵다. npm install이 새 맥북보다 3배는 느리다. 빌드 시간도 그렇고. 시간이 돈이라면, 느린 노트북 때문에 잃는 시간을 계산해볼 수도 있다.

하루에 빌드 대기 시간이 대략 8분이라고 치면, 한 달에 160분. 시급 환산으로 약 53,000원. 1년이면 636,000원. 근데 이 시간에 진짜로 일을 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그 8분은 어차피 멍때리거나 트위터를 보고 있었을 거다.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진다.

애착이라는 것

7년을 쓰다 보니 애착이 생겼다. 키보드에 손이 자연스럽게 맞고, 트랙포인트(ThinkPad 특유의 빨간 점)에 익숙해져서 마우스 없이도 작업이 된다. 새 노트북을 사면 이 손 기억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노트북으로 첫 사이드 프로젝트를 만들었고, 첫 기술 블로그 글을 썼다. 감정적 가치라는 게 있다. (사실 그냥 새 거 사기 싫은 거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

언젠가는 보내야 한다

영원히 쓸 수는 없다. Windows 11이 이 모델을 공식 지원하지 않아서 보안 업데이트가 언제 끊길지 모른다. 리눅스를 깔면 좀 더 쓸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아마 올해 안에는 새 노트북을 사지 않을까. 아니면 또 "아직 돌아가는데..."가 될 수도 있고. 이 글을 7년 된 ThinkPad에서 쓰고 있다는 게, 뭐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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