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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고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줄은 서고, 한 줄은 걷는 문화.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오늘도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

퇴근길,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 왼쪽으로는 바쁘게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는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걸어서 얼마나 빨라지는 걸까

에스컬레이터 한 구간이 대략 30초라고 치자.

걸어 내려가면 15초 정도 단축될까? 아무리 빨라봐야 20초?

그 15초를 아끼기 위해 우리는 에스컬레이터 절반을 비워두고 있다.

출퇴근 시간, 에스컬레이터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생각한다. 저 줄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걸어서 아끼는 시간보다 긴 거 아닌가?

두 줄로 서서 내려가면 수용 인원이 두 배가 된다. 대기 시간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고장의 원인이 된다

에스컬레이터는 서서 타도록 설계되었다.

한쪽으로만 하중이 쏠리면 어떻게 될까. 편마모가 발생한다. 부품이 비대칭적으로 닳는다. 고장 주기가 빨라진다.

서울교통공사 자료에 따르면, 에스컬레이터 고장 원인 중 상당수가 이 편하중 문제와 관련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끼려던 15초가, 결국 에스컬레이터 고장으로 모두의 시간을 뺏는 아이러니.

사고 위험

걸어 내려가다 넘어지면?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지는 사고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특히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거나, 하이힐을 신었거나, 어르신이나 어린이가 걸어 내려가다 균형을 잃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도미노처럼 뒤따르는 사람들도 위험해진다.

가만히 서서 내려가면 이런 위험이 크게 줄어든다.

외국은 어떨까

런던 지하철은 2015년에 실험을 했다.

홀본역에서 3주간 "두 줄로 서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결과는? 수송 효율이 30% 향상되었다.

일본도 최근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지 마세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나고야, 오사카 등 여러 도시에서 조례까지 만들어 걷기를 금지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는 "서서 타기"로 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꾸지 못할까

관성의 힘은 무섭다.

"한 줄은 서고, 한 줄은 걷는다"는 규칙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너무 당연해져 버렸다.

왼쪽에 서 있으면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비켜주세요"라는 말이 들린다. 심하면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두 줄로 서고 싶어도 사회적 압박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

바뀌려면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서울교통공사나 정부 차원에서 캠페인을 해야 한다. 안내 방송을 바꿔야 한다. 에스컬레이터마다 "두 줄로 서 주세요" 표지판을 붙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은 관용을 가져야 한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을 밀치지 말고, 잠시 기다려주는 여유.

15초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모두가 안전하고 편하게 이동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마무리

오늘도 나는 오른쪽에 섰다.

왼쪽에 서고 싶었지만, 뒤에서 오는 발소리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왼쪽에 서서, 두 줄로 내려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날이 오면 에스컬레이터도, 우리의 출퇴근도, 조금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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