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식 키보드 입문 후 빠진 토끼굴
키보드 하나 사려다가 3개가 된 과정과 그 안에서 배운 것들
시작은 멤브레인에 대한 불만이었다
회사에서 준 기본 키보드가 델 KB216이었다. 멤브레인. 타이핑이 물렁물렁하고 키감이 없어서 하루 종일 치면 손가락이 피곤했다. 동료가 쓰는 기계식 키보드에서 나는 촤라락 소리를 들으면서 "저거 한번 써봐야겠다" 생각했다.
키보드 하나만 사면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이미 실수가 시작됐다.
첫 구매: 레오폴드 FC660M
검색하면 입문용으로 계속 추천되는 모델이다. 적축으로 샀다. 12만 9천 원. 택배 오자마자 연결해서 쳤는데, "아, 이게 기계식이구나" 싶었다. 타건감이 확실히 다르다. 키가 눌리는 느낌이 명확하고 반발력이 있다.
한 달간 행복했다. 근데 유튜브에서 "커스텀 키보드" 영상을 본 게 화근이었다.
두 번째: 커스텀 입문
"윤활(루브)하면 키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영상을 봤다. 스위치를 하나하나 열어서 윤활유를 바르는 거다. 키 67개 기준으로 한 3시간 걸린다고. 미친 짓 같았는데 호기심이 이겼다.
키크론 Q2 베어본을 샀다. 13만 8천 원. 스위치는 가타론 밀키 옐로우, 3만 5천 원. 키캡은 PBT 더블샷, 4만 2천 원. 루브 키트 1만 8천 원. 합계 23만 3천 원.
스위치 루브를 처음 해봤는데, 67개 중 42개쯤에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싶었다. 근데 다 하고 조립해서 쳤을 때의 타건감이... 솔직히 레오폴드와는 차원이 달랐다. 톡톡거리던 소리가 탁탁으로 바뀌고, 스프링 소리가 사라졌다. (이 차이를 위해 3시간 반을 쓴 거다.)
세 번째: 이건 병이다
두 달 뒤에 또 샀다. 이번엔 앨리스 레이아웃이라는 인체공학 배열. 키크론 Q8. 왜 샀냐면 손목이 안쪽으로 꺾이는 게 불편하다는 걸 깨달아서... 라고 합리화했다. 실제로는 그냥 사고 싶었다.
베어본 17만 원 + 스위치 + 키캡까지 26만 원 정도 들었다. 세 키보드 합산하면 62만 2천 원이다. 키보드에 62만 원. (이걸 처음 계산했을 때 좀 충격받았다.)
사무실 반응
회사에 커스텀 키보드를 가져갔더니 반응이 두 부류였다. "와 소리 좋다, 뭐야 이거" vs "그거 왜 그렇게 비싼 거 쓰냐". 옆자리 동료가 타건 소리 듣더니 "좀 조용한 건 없냐"고 했다. 적축이라 조용한 편인데도 사무실에선 들린다.
결국 사무실용으로 사일런트 스위치를 따로 사서 교체했다. 2만 7천 원 추가 지출. 총 비용이 점점 늘어난다.
깨달은 것들
기계식 키보드 취미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거다. 스위치 종류만 수백 개, 키캡 프로파일도 Cherry, SA, MT3, KAT... 각각 타건감이 다르고, 조합하면 경우의 수가 무한하다.
근데 사실 코딩 생산성 면에서 12만 원짜리 레오폴드와 26만 원짜리 커스텀의 차이는 거의 없다. 타이핑 속도가 빨라지거나 에러가 줄거나 하진 않는다. 순수하게 타건감의 만족도 차이다.
이걸 알면서도 키보드 커뮤니티 눈팅을 멈출 수가 없다. 지금도 그룹바이 공지 보면 손이 근질거린다. 근데 더 이상은 안 산다고 다짐했다. 이번 달에만 세 번째 다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