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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은 메일 99+의 압박감

메일함을 열기가 무서운 사람의 고백

99+가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이폰 메일 앱에 빨간 배지가 뜬다. 99+. 안 읽은 메일이 99개를 넘었다는 뜻이다. 정확히 몇 개인지 확인해봤다. 247개. (이 중 절반은 뉴스레터일 거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입사 1년 차까지는 메일이 오면 바로 읽고 답장했다. 2년 차에 프로젝트가 겹치면서 "나중에 읽어야지" 하는 메일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 "나중에"가 안 오는 거다.

안 읽는 이유가 있다

메일의 종류를 분류해보면 이렇다.

바로 읽는 메일: 팀장이 보낸 거, 배포 관련 알림, 장애 알림. 이건 무조건 읽는다.

언젠가 읽을 메일: 기술 블로그 뉴스레터, 전사 공지, 다른 팀의 프로젝트 업데이트. 읽으면 좋지만 안 읽어도 당장 문제는 없다.

안 읽을 메일: 마케팅 메일, 서비스 약관 변경 알림, LinkedIn 알림. 읽을 이유가 없는데 삭제하기는 귀찮다.

문제는 "언젠가 읽을 메일"이 계속 쌓인다는 거다. 이게 100개가 넘으면 "이제 정리하기엔 너무 늦었어"라는 심리가 작동한다.

메일 정리를 시도한 적이 있다

3개월 전에 "오늘은 메일함 정리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2시간을 투자했다. 247개를 하나씩 보면서 분류했다.

삭제: 89개. 대부분 마케팅과 알림 메일. 읽고 처리: 43개. 이 중 몇 개는 이미 기한이 지난 요청이었다. (미안합니다...) 보관: 67개. 나중에 참고할 수 있는 기술 문서나 정책 변경 건. 남은 것: 48개. 뉴스레터인데 읽을까 말까 고민되는 것들.

2시간 뒤 안 읽은 메일이 48개로 줄었다. 성취감이 있었다. 근데 1주일 뒤에 다시 87개가 됐다. (하루 평균 5~6개의 메일이 새로 온다.)

제로 인박스가 진짜 가능한가

인터넷에서 "제로 인박스" 방법론을 찾아봤다. 메일을 받는 즉시 처리하고, 2분 안에 끝낼 수 있으면 바로 하고, 아니면 할 일 목록에 넣고 메일은 아카이브하라고.

일주일 시도해봤다. 첫 이틀은 됐다. 근데 사흘째부터 코딩 중에 메일이 오면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쌓이기 시작.

이 방법이 잘 맞는 사람이 있겠지만, 개발자한테는 좀 안 맞는 것 같다. 코딩할 때 컨텍스트 스위칭 비용이 크니까. 메일 하나 읽으려고 코드에서 눈을 떼면 다시 집중하는 데 23분 걸린다는 연구를 본 적이 있다. (정확한 숫자인지는 모르겠는데 체감은 맞다.)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았다

결국 내가 찾은 방법은 이렇다.

하루에 두 번만 메일을 확인한다. 오전 9시, 오후 3시. 그 외 시간에는 메일 알림을 끈다.

확인할 때 "바로 처리 / 나중에 / 삭제"로 3초 안에 판단한다. "나중에"는 슬랙 리마인더로 옮긴다. 메일함에 그냥 두면 잊어버리니까.

뉴스레터는 금요일 오후에 몰아서 읽는다. 안 읽히면 전부 삭제.

이 방법으로 안 읽은 메일이 30개 이하를 유지하고 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99+보다는 훨씬 낫다.

빨간 배지의 심리학

사실 안 읽은 메일 247개가 실질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은 별로 없다. 정말 중요한 건 슬랙이나 전화로 오니까. 근데 그 빨간 배지가 주는 심리적 압박이 의외로 크다. "처리 못한 일이 있다"는 신호가 항상 시야에 있으면, 쉬고 있어도 완전히 쉬는 느낌이 아니다.

배지를 끄면 되는 거 아니냐고? 끄면 진짜 중요한 메일도 놓칠까 봐 못 끈다. 이것도 일종의 불안이다.

아무튼 지금은 30개 이하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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