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쓰는데 왜 죄책감이 드는 걸까
분명 내 권리인데, 연차 신청 버튼을 누르는 손이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연차 신청 버튼 앞에서 3분
금요일에 연차를 쓰려고 했다. HR 시스템에 들어가서 날짜를 선택하고, 사유에 "개인 사유"를 적었다. 그리고 신청 버튼 앞에서 멈췄다.
이번 주 스프린트에 내 작업이 2개 있는데, 금요일까지 끝낼 수 있나? 팀원들한테 부담이 가지 않을까? 매니저가 뭐라고 생각할까?
3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눌렀다. 근데 누르고 나서도 찝찝했다.
연차는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다. 15일. 1년 열심히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유급 휴가. 근데 왜 권리를 행사하는데 죄책감이 드는 걸까.
연차 사유를 왜 적어야 하나
우리 회사는 연차 사유가 필수 입력이다. "개인 사유"라고 적으면 되긴 하는데, 뭔가 성의 없어 보여서 "병원 예약"이나 "관공서 방문" 같은 걸 적게 된다.
솔직히 금요일 연차의 진짜 이유는 "그냥 쉬고 싶어서"다. 집에서 늦잠 자고, 넷플릭스 보고, 카페 가고 싶다. 근데 이걸 사유란에 적을 수는 없다.
왜 적을 수 없나? 법적으로 연차 사유를 안 밝혀도 된다. 근데 문화적으로 "그냥 쉬고 싶어서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압박.
(이건 회사 문제일 수도 있고 내 성격 문제일 수도 있다.)
연차 쓴 날의 슬랙
연차를 쓰고 쉬는 날에도 슬랙을 본다. 이게 문제다.
"나 없이 일이 잘 돌아가면 좋겠다"와 "나 없이 일이 잘 돌아가면 좀 서운하다" 사이 어딘가에 있다. 슬랙을 열어보면 내 이름이 멘션된 게 3개쯤 있다. 답장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한번은 연차인데 긴급 장애가 터져서 결국 노트북을 켠 적이 있다. 1시간 43분 동안 원인 파악하고 핫픽스 배포했다. 그날의 연차는 반만 쉰 셈이다. 대체 휴가를 따로 안 받았다. 왜? 그냥 그러려니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판단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만드는 죄책감
우리 팀에 연차를 거의 안 쓰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작년에 15일 중 3일만 썼다고 한다. 이 사람이 열심히 하는 건 인정한다. 근데 문제는 이 사람이 기준이 되면 나머지가 부담스러워진다는 거다.
"저 사람은 안 쉬는데 나만 쉬어도 되나?"
이런 비교가 무의식적으로 생긴다. 연차를 안 쓰는 게 미덕이 되고, 연차를 쓰는 게 약간 민폐처럼 느껴지는 분위기. 아무도 대놓고 그렇게 말하진 않는다. 근데 공기가 그렇다.
해외는 다르다는 말
외국 회사 다니는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 독일 회사에서는 연차를 안 쓰면 매니저한테 "왜 안 쉬냐"고 혼난다고 한다. 강제로 쉬게 한다고.
부럽기도 하고, 정말인가 싶기도 하고. 문화 차이라고 하면 쉽지만, 결국 "쉬는 게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는 걸 시스템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다.
우리도 알고 있다. 쉬어야 잘 일한다는 거. 근데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다르다. 연차 신청 버튼 앞에서 3분 고민하는 내가 그 증거다.
다음 달에 연차 2일을 연달아 쓸 계획이 있다. 벌써부터 마음이 좀 무겁다. 이 무거움이 언제 사라질까. 아마 연차 소진율 100%를 달성해도 안 사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