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가 엔젤 투자를 해보니
지인 스타트업에 500만 원 엔젤 투자한 1년간의 경험담
어떻게 시작됐냐면
전 직장 동료가 퇴사하고 스타트업을 차렸다. B2B SaaS 서비스. 기술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고, MVP를 이미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초기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500만 원만 넣어줄 수 있어?"
처음에는 "엔젤 투자가 뭐야, 나 같은 월급쟁이가?" 싶었다. 근데 알아보니 법적으로 최소 금액 제한 없이 투자 가능했다. 500만 원이면 내 저축의 상당 부분이지만 잃어도 인생이 끝나지는 않는 금액이라고 판단했다.
2025년 6월에 투자했다. 지분 1.2%. (이 숫자가 의미 있어지려면 회사 가치가 수십억은 돼야 한다.)
투자 전에 확인한 것들
개발자라서 기술 검증은 할 수 있었다. 코드베이스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실제로 보여줬다. 아키텍처가 합리적이었고, 기술 부채가 관리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건 비개발자 투자자는 못 하는 판단이다.
근데 기술만 보면 안 된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시장 크기, 영업 능력, 번 레이트, 경쟁사 현황. 이런 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 판단이 어려웠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동료의 답변이 자신감 넘쳤다. "월 매출 1천만 원은 6개월 안에 가능해." 자신감은 근거가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6개월 후: 현실
6개월째 월 매출이 230만 원이었다. 목표의 23%. 고객 수 14개 회사. 제품은 좋은데 영업이 안 된다고 했다. B2B는 제품만 좋다고 팔리지 않는다는 걸 그때 배웠다.
번 레이트가 월 800만 원인데 매출이 230만 원이면 매달 570만 원씩 까먹는 거다. 초기 투자금이 다 합쳐서 8천만 원이었으니까 14개월이면 바닥이다.
"추가 투자 라운드를 열겠다"는 연락이 왔다. 추가로 넣겠냐고. 솔직히 고민됐다. 근데 이미 500만 원을 넣은 상태에서 추가 투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다. 거절했다.
개발자 투자자의 딜레마
투자자인데 개발도 좀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주말에 몇 시간만. 처음에는 도왔다. 근데 이게 점점 늘어서 주말 하루를 통째로 쓰게 됐다.
돈을 넣었으니까 회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거절을 못 했다. 이건 내 실수다. 투자와 노동은 별개인데, 소규모 엔젤 투자에서는 이 경계가 흐려진다. 3개월 후에 "더 이상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는데, 그 과정에서 관계가 좀 어색해졌다.
(지인한테 투자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1년 후 현재 상태
회사는 아직 살아있다. 시드 투자를 유치해서 런웨이가 늘었다. 월 매출이 480만 원까지 올랐다. 흑자전환은 아직 멀었지만 방향은 나쁘지 않다.
내 500만 원의 현재 가치? 솔직히 알 수 없다. 회사가 상장하거나 인수되기 전까지는 종이 위의 숫자일 뿐이다. 0이 될 수도 있고 5천만 원이 될 수도 있다. 이 불확실성이 엔젤 투자의 본질이다.
배운 것들
엔젤 투자는 여유 자금으로 해야 한다. 500만 원이 아까워서 밤에 잠 못 자면 안 된다. 나는 500만 원을 잃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기술 검증과 비즈니스 검증은 별개다. 개발자니까 기술은 볼 수 있는데, 시장성은 못 봤다. 다음에 한다면 사업 경험 있는 사람의 의견을 꼭 들을 거다.
지인 투자는 관계 리스크가 있다. 돈 문제가 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걸 감수할 수 있는 관계인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다시 하겠냐고 하면, 아마 할 거다. 근데 다음엔 기술만 보고 투자하지는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