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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두리스트 무덤에 대하여

지금까지 시도한 투두리스트 앱 17개, 그리고 왜 전부 실패했는지

폰에 투두 앱이 3개 깔려 있다

지금 내 폰에는 Todoist, TickTick, Apple 미리알림이 동시에 깔려 있다. 세 개 다 쓰고 있냐고? 아니. 세 개 다 안 쓰고 있다. 정확히는, 세 개 다 마지막으로 연 게 2주 전이다. (Todoist는 3주.)

돌이켜보면 2019년부터 지금까지 시도한 투두리스트 앱이 17개다. Wunderlist부터 시작해서 Any.do, Microsoft To Do, Notion, Things 3, Superlist까지. 전부 처음 2주는 열심히 쓰다가 자연스럽게 손이 안 갔다.

처음엔 항상 설레잖아

새 투두 앱을 깔면 일단 기분이 좋다. 기존 할 일들을 옮기면서 "이번엔 진짜 쓸 거야"라는 다짐을 한다. 카테고리를 나누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반복 일정을 설정한다. 이 세팅하는 과정 자체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근데 그게 함정이다. 투두리스트를 예쁘게 정리하는 행위가 실제로 할 일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걸 17번째에서야 깨달았다. (느리다. 알고 있다.)

근데 종이에 쓰는 건 좀 다르더라

작년에 회사 책상에 아무 생각 없이 포스트잇을 붙여놨다. "PR 리뷰 3개", "점심 전에 배포", "석진이한테 슬랙". 그날 3개를 다 했다. 다음 날도 포스트잇을 붙였다. 그 다음 날도.

포스트잇이 3개월 넘게 지속됐다. 17개 앱이 전부 2주 안에 버려진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차이다.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포스트잇에는 3개밖에 못 적기 때문인 것 같다. 공간이 작으니까 진짜 중요한 것만 쓰게 된다. 앱에서는 할 일을 50개씩 쌓아놓고 압도당하는데, 포스트잇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생산성 유튜버한테 속은 것들

"세컨드 브레인을 구축하세요." 이 말에 속아서 Notion에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만드는 데 주말 이틀을 썼다. 데이터베이스 릴레이션까지 걸었다. 그 시스템을 실제로 사용한 건 4일이었다. (정확히는 4일째에 할 일을 안 적고 퇴근했고, 그 뒤로 다시 안 열었다.)

생산성 도구에 시간을 쓰는 것 자체가 비생산적이라는 아이러니. 투두리스트를 관리하는 게 하나의 할 일이 되어버리면 이미 진 거다.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냐면

모니터에 포스트잇 3장. 오늘 할 일 최대 3개. 끝나면 버린다. 앱 알림도 없고, 싱크 걱정도 없다. 포스트잇 값이 한 달에 3,200원 정도인데, Todoist 프리미엄이 연 48,00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훨씬 싸다.

물론 장기 프로젝트나 팀 업무는 지라(Jira)에서 관리한다. 근데 개인 할 일 관리는 포스트잇이면 충분하다. 솔직히 투두 앱 18번째를 깔 뻔한 적이 있다. Superlist 업데이트 소식을 보고. 근데 참았다. 나는 투두 앱 중독자였고, 이제 회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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