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협상에서 배운 세 가지
세 번의 이직과 다섯 번의 연봉 협상을 거치며 깨달은 것들
첫 협상에서 500만 원을 날렸다
첫 이직 때 연봉 협상이라는 걸 처음 해봤다. 인사담당자가 "희망 연봉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었을 때, 현재 연봉에 500만 원을 더한 숫자를 말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500만 원이나 더 부르다니, 욕심 부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상대방이 바로 "네, 좋습니다" 했을 때 기뻤다. 근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의문이 들었다. 바로 수락했다는 건 내가 너무 낮게 불렀다는 뜻 아닌가. 나중에 같은 포지션 동기한테 물어보니 나보다 700만 원을 더 받고 있었다. 그날부터 연봉 협상을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700만 원 생각하면 좀 아프다. 7년 동안 복리로 따지면 차이가 더 크다.)
먼저 숫자를 말하지 마라
이건 앵커링 효과 때문이다. 내가 먼저 숫자를 말하면, 그 숫자가 기준점이 된다. 낮게 부르면 상대방은 기꺼이 수락하고, 높게 부르면 깎기 시작한다.
"현재 연봉 수준과 시장 상황을 고려해서 합리적인 제안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돌려 말하는 게 좋다. 상대방이 먼저 숫자를 내면, 거기서 위로 협상할 수 있다. 불편할 수 있는데, 이 불편함이 수백만 원의 차이를 만든다.
두 번째 이직 때 이 전략을 썼더니, 회사가 먼저 제시한 금액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800만 원 높았다. 내가 먼저 말했으면 그 800만 원을 놓쳤을 거다. 800만 원이면 해외여행 두 번은 간다. 아니, 세 번은 갈 수도 있다.
감정 말고 데이터를 가져가라
"더 받아야 합니다"는 협상이 아니다. "더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가 필요하다.
세 번째 이직 때 이렇게 준비했다. 원티드랑 프로그래머스에서 비슷한 연차, 비슷한 스택 채용 공고 22개를 모았다. 공개된 연봉 범위에서 중간값을 계산하고, 내가 이 회사에서 낼 수 있는 구체적 성과 3가지를 정리했다. 성능 개선 경험, 코드 품질 향상 사례, 주니어 멘토링 경험.
"시장 평균은 이 정도이고, 저는 이런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금액을 요청드립니다" — 이렇게 말하면 감정적 요구가 아니라 비즈니스 제안이 된다.
연봉 숫자가 전부는 아니다
마지막 이직에서 연봉을 300만 원 양보하는 대신 재택근무 주 3일, 교육비 연 200만 원, RSU 추가 배정을 받았다. 금전적으로 환산하면 300만 원보다 훨씬 큰 이익이었다.
재택근무는 출퇴근 시간 왕복 2시간을 아껴준다. 연간 480시간. 시급으로 계산하면 이것만으로 수백만 원 가치다. 교육비 200만 원은 컨퍼런스, 온라인 강의, 기술 서적에 쓸 수 있어서 성장에 직결된다.
협상 테이블에서는 총 패키지를 봐야 한다. 연봉, 보너스, 스톡, 복지, 근무 환경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진짜 가치를 알 수 있다.
협상은 전투가 아니라 관계다
공격적으로 나가면 당장 좀 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입사 후 관계가 꼬일 수 있다. 인사팀과의 첫 만남이 갈등이면 앞으로가 불편하다.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싶습니다"라는 태도가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근데 이건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를 수 있다. 나는 관계 유지 쪽이 맞았을 뿐이다.
이직 안 하고도 15% 올린 적 있다
현재 회사에서도 비슷한 원칙을 적용했다. 지난 1년 성과를 수치로 정리했다. API 응답 속도 40% 개선, 신규 기능 12건 출시, 주니어 2명 온보딩 완료. 시장 대비 내 위치를 보여주고, 향후 계획을 제시했다. 이직하지 않고 15% 인상을 받았다.
이직하면 적응 기간 에너지도 들고 새 환경의 리스크도 있다. 현재 회사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물론 현재 회사에서 아무리 말해도 안 올려주면, 그때는 이직이 답이다.
연봉 협상이 불편한 건 당연하다. 나도 아직도 긴장된다. 근데 누구도 나 대신 내 가치를 말해주지 않는다. 첫 협상에서 500만 원 덜 받은 게 아팠지만, 그 아픔이 이후 모든 협상을 바꿔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