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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에 뭐라고 적어야 할까

프론트엔드인지 풀스택인지 그냥 개발자인지, 명함 한 장에 정체성 고민을 담는 이야기

네트워킹 행사에서 명함이 없었다

지난달에 스타트업 밋업에 갔다. 100명 넘게 모인 자리였는데, 다들 명함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만 폰 번호를 불러주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카오톡 ID를 불러줬는데, 상대방이 메모장에 적는 모습이 좀 민망했다.)

집에 오는 길에 명함을 만들기로 했다. 디자인은 금방 정했다. 문제는 직함이었다.

"풀스택 개발자"가 맞긴 한데

회사에서는 프론트엔드를 주로 한다. React, Next.js가 메인 스택이다. 근데 백엔드도 한다. Node.js로 API 만들고, AWS 인프라도 건드린다. DB 스키마도 설계한다. 그러면 풀스택 맞지 않나?

근데 "풀스택 개발자"라고 적으면 뭔가 애매하다. 프론트도 백도 중간만 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사실 프론트엔드는 꽤 깊이 아는데 백엔드는 "돌아가게는 만든다" 수준이다. (솔직히 DB 인덱스 최적화 같은 건 매번 구글링한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적나 찾아봤다

트위터에서 개발자 명함 사진들을 한 시간 동안 뒤졌다. "Software Engineer"가 가장 무난했다. "Frontend Developer", "Backend Engineer", "DevOps Engineer" 같은 구체적인 것도 있었다. 인상 깊었던 건 "Problem Solver"라고 적은 사람. (솔직히 좀 오글거리긴 했다.)

스타트업 대표들은 "Co-Founder & CTO"가 많았다. 1인 개발자인데 CTO라고 적은 사람도 봤다. 틀린 건 아닌데 좀 웃겼다.

결국 두 가지 버전을 만들었다

버전 A: "Software Engineer" 버전 B: "Frontend Developer"

100장씩 인쇄하는 데 32,000원. 두 버전이니까 64,000원. 좀 아까웠는데 결국 둘 다 만들었다. 개발자 모임에서는 B를, 비개발자가 많은 자리에서는 A를 쓰기로 했다.

근데 막상 두 달 지나고 보니까 A만 쓰고 있다. B는 서랍에 그대로 있다. "Frontend Developer"라고 하면 "아 홈페이지 만드시는 분이요?" 라는 반응이 와서.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매번 설명하기 귀찮다.)

명함보다 중요한 건 뒷면이었다

앞면에 이름, 직함, 연락처를 넣고, 뒷면에 GitHub 주소와 블로그 URL을 넣었다. 근데 실제로 뒷면을 보고 GitHub에 들어온 사람이 두 달 동안 3명이었다. (Analytics로 확인했다. 정확히 3명.)

그래도 이 3명 중 한 명이랑 사이드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됐으니까, 명함값은 한 건가.

정체성은 명함 한 장에 안 담긴다

결국 명함은 대화를 시작하는 도구일 뿐이다. "Software Engineer"든 "Frontend Developer"든 명함을 건네고 나서 하는 3분 대화가 훨씬 중요하다. 그 3분 안에 "이 사람이랑 한번 더 얘기해보고 싶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면 직함은 별로 상관없다.

근데 아직도 가끔 명함을 건넬 때 "이게 나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5년 차인데도 정체성이 이렇게 흔들리나 싶다가, 사실 5년 차니까 흔들리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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