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의는 이메일이면 됐다
한 시간 회의가 끝나고 남는 건 회의록 한 장과 허무함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이 모일까.
파란색, 녹색, 보라색
월요일 아침, 구글 캘린더를 열었다.
파란색, 녹색, 보라색 블록이 빼곡하다. 오전 10시 스프린트 회의. 11시 디자인 리뷰. 오후 2시 기술 공유. 3시 반 프로젝트 싱크. 4시 반 1on1.
코딩할 시간이 없다. 회의 사이 30분 간격으로 코드를 써야 한다. 30분은 컨텍스트를 다시 잡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회의를 하느라 일을 못 하고, 일을 못 해서 야근을 한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야 하지.
한 시간의 진짜 비용
6명이 참석하는 1시간 회의가 있다.
6인시다. 시니어 개발자 시급으로 환산하면 회의 한 번에 수십만 원이 든다. 하루에 이런 회의가 세 번이면 팀 하루 비용 상당 부분이 회의실에서 소비된다.
정보 공유가 목적이라면 문서 한 장으로 10분 만에 끝난다. 의사 결정이 목적이라면 결정권자 2~3명만 모이면 된다. 근데 회의를 줄이자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줄이기는 어렵다. 왜일까.
일한 기분이 드니까
회의에 참석하면 일한 기분이 든다.
한 시간 동안 발언하고, 의견을 나누고, 노트에 뭔가 적으면 생산적이었다고 느낀다. 근데 회의실을 나서면 아무것도 안 바뀌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 허무함이 익숙해졌다는 게 좀 무섭다.)
회의의 함정은 논의와 실행을 혼동하게 만든다는 거다.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가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로 둔갑한다. 정말 생산적인 회의는 끝날 때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할지가 정해져 있다. 그게 없으면 그건 회의가 아니라 그냥 대화였다.
"이거 회의 잡아서 이야기하죠"
원격 시대에 더 심해진 현상이 있다.
슬랙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텍스트가 오간다. 그러다 누군가 말한다. "이거 회의 잡아서 이야기하죠." 30분 회의가 잡힌다. 6명이 줌에 접속한다. 그리고 15분 만에 끝난다. 나머지 15분은 잡담. "그럼 이만" 하고 끊으면 허무하니까 억지로 시간을 채운 거다.
애초에 슬랙 스레드로 끝낼 수 있었다. 근데 텍스트로 의견을 정리하는 건 에너지가 들고, 회의를 잡는 건 쉽다. 어려운 글쓰기 대신 쉬운 수다를 선택하는 거다. 나도 그런다. (반성 중이다.)
문서 하나의 힘
우리 팀에서 한 달간 실험을 했다.
"회의 전에 문서로 먼저 공유한다." 이 규칙 하나를 추가했을 뿐인데 회의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문서를 쓰는 과정에서 논점이 정리되니까, 굳이 모이지 않아도 해결되는 것들이 있었다. 남은 회의는 시간이 짧아졌다. 배경 설명이 필요 없으니 바로 논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필요한 회의도 있다. 갈등이 있을 때, 텍스트로는 뉘앙스가 전달 안 될 때, 빠른 브레인스토밍이 필요할 때. 이런 경우에는 모이는 게 맞다.
캘린더에 빈칸을
오늘도 캘린더를 본다.
내일 회의 세 개 중 하나는 거절해볼까 생각한다. "이 회의의 목적이 뭔가요?" 한 줄 질문을 보내볼까. 아직 안 보냈다. 좀 눈치가 보여서.
캘린더의 빈칸이 곧 코드를 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내가 실제로 일하는 시간이다.
가장 생산적인 회의는 열리지 않는 회의다. 근데 이 말을 회의에서 하기가 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