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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패션 스테레오타입에 대하여

체크셔츠에 카고바지? 후드티에 슬리퍼? 개발자 패션이란 게 진짜 있는 건지 생각해봤다.

회사에서 나만 청바지를 안 입고 있었다

지난주 팀 회식 사진을 봤다. 8명 중 6명이 청바지에 후드티 또는 맨투맨이었다. 나머지 2명 중 하나가 나인데, 나는 슬랙스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반바지에 슬리퍼.

근데 이게 우리 팀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IT 회사 건물 1층 로비에서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패턴이 보인다. 검정 아니면 회색, 로고가 박힌 후드티, 운동화. 유니폼이 없는데 유니폼 같다.

왜 이렇게 됐을까

솔직히 이해는 된다.

출근 시간에 옷 고르는 데 5분 쓰기 싫다. 코드에 쓸 뇌 에너지를 패션에 쓰고 싶지 않다. 스티브 잡스가 매일 같은 옷을 입은 이유도 의사결정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나. (사실 이건 좀 과대포장된 것 같지만.)

그리고 개발자 문화 자체가 외모보다 실력을 중시한다는 뉘앙스가 있다. 드레스코드가 자유로운 게 자랑인 문화. "우리는 겉모습 안 봐요"라는 메시지.

근데 결과적으로 보면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자유인데 획일적이다. 이 아이러니.

한번 다르게 입어봤더니

어느 날 코트에 터틀넥을 입고 출근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날씨가 쌀쌀해서.

근데 반응이 웃겼다. "오늘 면접이야?" "어디 가?" "소개팅?" 그냥 좀 다른 옷을 입었을 뿐인데 이벤트로 인식하는 거다. 평소에 그만큼 무관심 모드가 디폴트라는 뜻이다.

사실은 조금 신경 써서 입은 게 맞다. 근데 그걸 말하면 또 이상한 놈 취급받을 것 같아서 "그냥 이거밖에 없어서"라고 했다.

패션에 신경 쓰면 일 못하는 사람인가

이건 좀 찝찝한 부분이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가끔 이런 분위기가 있다. 외모에 신경 쓰는 개발자 = 뭔가 실력이 덜할 것 같은. 코딩할 시간에 옷이나 고르고 있는. 물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근데 은근히 그런 공기가 있다.

반대로 구겨진 티셔츠에 안경 쓰고 있으면 "진짜 개발자" 같다는 인식. 이건 스테레오타입이 만들어낸 편향이다.

옷 잘 입으면서 코드도 잘 짜는 사람 많다. 당연히. 근데 내가 그런 사람인 건 아니다. 나는 옷에 관심을 좀 가져보려고 하는 개발자일 뿐이다. 코드 실력은... 뭐 보통.

결국 편한 게 이기긴 한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늘 나는 회색 맨투맨에 검정 조거팬츠를 입고 있다. 집에서 재택이라 더 그렇긴 한데, 솔직히 출근날에도 비슷하다.

34,900원짜리 유니클로 맨투맨이 2벌 있다. 거의 교복처럼 번갈아 입는다. 패션에 관심이 있다고 해놓고 이 꼴이다.

(근데 편한 건 진짜 편하다.)

결론이 뭐냐면, 개발자 패션 스테레오타입은 분명 존재하고, 나는 거기에 반기를 들고 싶었는데, 결국 나도 그 안에 있다는 거다. 자유로운 척하면서 다 같은 옷을 입고, 패션에 관심 있는 척하면서 유니클로 맨투맨을 돌려 입는. 이게 현실이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다른 걸 입어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내일도 아마 같은 맨투맨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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