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5 min read

커리어 플랜이라는 걸 세워보긴 했는데

1년 차에 세운 5년 계획이 어떻게 완전히 빗나갔는지에 대하여

1년 차에 5년 계획을 세웠다

신입 때 회사에서 "커리어 개발 계획서"를 쓰라고 했다. 5년 후 목표를 적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썼다.

1년 차: React 숙달. 2년 차: 풀스택으로 확장. 3년 차: 시니어 승진. 4년 차: 팀 리드. 5년 차: 기술 블로그로 유명해지기.

깔끔한 계단형 성장. 각 단계에 구체적인 목표와 기한까지 적었다. 팀장이 "좋은 계획이네"라고 했을 때 뿌듯했다.

지금 5년 차다. 위 계획 중 달성한 게 하나도 없다.

현실은 이랬다

1년 차: React를 쓰긴 했는데, 회사가 Vue.js로 마이그레이션했다. React 숙달은커녕 Vue를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2년 차: 풀스택은 무슨, 프론트엔드만으로도 벅찼다. 회사가 인수됐고, 새 코드베이스에 적응하느라 6개월을 썼다.

3년 차: 시니어 승진? 승진 심사에서 두 번 떨어졌다. 앞에서 쓴 글과 같은 이야기다.

4년 차: 팀 리드는 맡았는데, 계획에서 상상한 것과 완전히 달랐다. 코딩하는 시간보다 회의하는 시간이 많았고, 사람 관리 스트레스에 3개월 만에 내려놨다.

5년 차: 블로그는 쓰고 있지만, "유명"과는 거리가 멀다.

(이 목록을 쓰면서 좀 쓸쓸해졌다.)

계획이 빗나간 이유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예측 불가능한 외부 변수. 회사 인수, 기술 스택 변경, 조직 개편. 이런 건 계획할 수 없다. 둘째, 내가 변했다. 1년 차 때 원하던 것과 5년 차 때 원하는 게 다르다. 팀 리드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나는 코드를 짜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었다.

계획이 빗나가는 게 당연한 건데, 계획을 세울 때는 그걸 모른다. "5년 후의 내가 뭘 원할지"를 지금의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커리어 플랜이 무의미한가

완전히 무의미하진 않다. 방향은 줬다. "성장하고 싶다", "기술적으로 깊어지고 싶다"는 큰 방향은 변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단계가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커리어 플랜을 이렇게 세운다. 5년 계획 대신 6개월 계획. 구체적인 기술 목표 대신 방향성 목표. "Go를 배우겠다"가 아니라 "백엔드 역량을 넓히겠다". Go가 안 맞으면 Rust로 바꿔도 되니까.

주변 사람들의 커리어 경로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 동기 6명한테 "1년 차 때 세운 계획대로 됐어?"라고 물었더니 0명이 "예"라고 답했다. 한 명은 개발자에서 PM으로 전향했고, 한 명은 창업했다가 다시 개발자로 돌아왔고, 한 명은 해외로 갔다. 다들 예상 밖의 경로를 걷고 있었다.

내가 배운 것

커리어는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라는 말이 있다. 위로만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옆으로도 가고 가끔 아래로도 내려가면서 자기 자리를 찾는 거다. 사다리에서는 한 칸 떨어지면 실패이지만, 정글짐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뿐이다.

근데 이건 멋있는 비유이고, 현실에서는 방향을 모를 때 불안하다.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수시로 든다. 이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안 올 것 같고, 불안한 채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6개월 뒤에 다시 이 글을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겠지. 그때 가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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